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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패기

드디어 집이_여덟 번째 이야기

매일 밤새도록 여기저기 파티가 벌어지는 이 곳 가부키쵸, COMA극장 앞 광장은 나의 침실이었다. 배낭을 베개 삼아 하루 밤 청했다. 그리고 아침에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도쿄에 가서 느낀 것이지만 이렇게 큰 도심에 까마귀가 무척 많았다.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물이나 쓰레기통을 뒤져 가며 사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일지는 몰라도 한국 까마귀보다 크기도 훨씬 큰 것 같았다.

배낭을 지하철 사물함에 넣어 두고 아침부터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위해 신주쿠 역 주변으로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신주쿠역 반경 5Km 이내는 샅샅이 다닌 것 같다.

힘들면 백화점이나 전자상가에 들어갔다. 특히 백화점은 냉방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더위를 식히게 하는데는 최고며 지친 나를 잠시나마 즐겁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지하 식품매장에 가면 시식코너들이 있어 일본 음식을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었다. 일본 생활 초기 한 동안은 각 백화점 시식코너를 자주 이용했다. 가끔 운이 좋아 꽃게 튀김을 시식으로 먹을 수 있었는데 갓 튀긴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향긋한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니는데 배고 고프고 발이 너무 아팠다. 비록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 아버지에게 받은 돈이 있었지만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전에는 한정된 돈을 무작정 쓸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배고플 때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저녁으로 슈퍼마켓에 파는 샌드위치용 식빵을 사 굶주린 배에 채워 넣는데 사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식사가 아니라 빈 속을 달래는 수준이었다. 사실 이때는 땀을 많이 흘려 목이 말라도 100엔짜리 음료수도 사 먹기 싫었다.

일본 도착 후 며칠 동안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곳은 내가 일본어를 못하는 것이 결정적이었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곳은 사람을 구해는 곳이 없었고 가끔 사람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일본어 학교 수업 시간과 겹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다시 거리로 나 온지 이틀이 지나 인석이 형을 찾아갔다.

나를 보자마자 나보다 더 좋아하며 잠시 거주할 방이 생겼다고 했다. 인석이 형 친구인데 혼자 방을 쓰고 있었고 한 달 후 다른 친구가 같이 생활하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오기 전까지 같이 있어도 좋다고 했단다.

그렇게 나는 성철이 형을 만났다. 이 형도 다른 곳에서 붕어빵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같이 성철이 형 집으로 갔다. 맨션 형태로 아주 작은 공간의 집이었다. 하지만 욕실도 있고 세탁기, 냉장고, TV, 에어컨까지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 편해져 나태해 질까 두려웠다.

그래도 아직 완전 안정된 것이 아니기에 긴장의 끈을 늦추어선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