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해진 마음_서른 여덟 번째 이야기
일을 마치고 집에 가니 휴대폰 요금 통지서가 도착해 있었다. 요금을 내러 은행에 가야 되는데 갈 시간이 쉽게 나지 않을 것 같아 통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생각하고 있으니 야마다 형이 본인 휴대폰 요금 통지서를 주면서 내일 같이 내어 달라고 했다.
은행에 갈 시간이 없어 내일은 못 낼 것 같다고 하니 형이 말없이 웃었다. 그러면서 콤비니(편의점)에 가서 내면 된다는 것이다.
“예?, 요금을 콤비니에 낸다구요?”
“그럼, 그런 건 편하더라.”
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한 편의점에 들러 요금 통지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점원은 물건을 계산하듯 통지서의 한 쪽 모서리에 있는 바코드를 찍었고 나는 돈을 건 내니 영수증에 도장을 찍고 다시 주었다. 편리하고 생소하기도 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정말 귀엽고 예쁜 여자 한 명이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고 모두들 새로 온 학생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와 소개를 시켰는데 알고 보니 교생 실습을 나온 대학생이었다.
이름은 카와구찌 나미코이며 일본에 와서 이렇게 예쁜 사람을 처음 본 것 같았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 쉬는 시간에 다른 사람이 말을 걸기 전에 먼저 말을 걸었다. 옆에서 동광이가 난리다. 내가 나쁜 놈이니까 나랑 이야기하지 말고 자기랑 이야기 하자고 했다. 그런 우리의 행동이 재미있는지 살며시 미소를 짓고 이야기를 하는데 목소리도 예뻤다.
우리 반 친구들은 나미코를 나짱이라 불렀고 예쁘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쉬는 시간에 일부러 나짱을 보러 오기도 했다.
나짱의 2주간 교생 실습기간 동안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11월의 중순이 지나갔고 중간고사를 치뤘다.
욕심 같았으면 더 많이 공부하고 싶고 시험 준비도 많이 하고 싶었지만 일을 하다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게 본 것 같았지만 한자는 외워도 외워도 자꾸 잊어버렸다.
시험이 끝난 다음 날 학교에서 소풍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매 학기마다 한 번씩 도쿄 인근으로 여행이나 소풍을 가는데 이번에는 요요기 공원으로 소풍을 간다고 했다. 마마에게 부탁해서 쉬는 날을 소풍 가는 날로 변경했다.
소풍 가는 날 신주쿠에서 동광이를 만나 같아 갔다. 학교 전체 학생들이 참석해서 여러 게임도 하고 사진도 찍고 각자 싸온 도시락을 나눠 먹기도 했다. 동광이는 일하는 가게에서 스시를, 나는 주방장이 소풍간다고 만들어 준 소고기김치볶음밥을 같은 반 친구들과 같이 먹었다.
오늘 소풍을 마지막으로 나짱도 대학교로 돌아간다. 동광이와 나는 환송식을 하자며 돌아오는 길에 신주쿠에서 놀기로 했다. 시로키야라는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셨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가라오케로 향했다. 나짱은 노래도 무척 잘했다. 노래 잘 부른다며 칭찬을 했더니 하라주쿠 라이브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콘서트도 하는 아마추어 가수라고 했다.
가라오케를 나와 나짱을 전철역에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애인이 기다리고 있다는 했고 동광이와 나는 애인이 어떤 사람이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짱은 수줍어하며 애인 이야기를 했다. 일본 자이언츠의 야구 선수인데 재미있고 자기한테 잘해 준다며 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 남자와 결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행동도 바르고 마음씨도 착한 나짱을 색시로 얻게 되는 그 남자는 참 좋겠다며 동광이와 나는 쓸쓸히 뒤 돌아 서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 잠 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아보니 내 마음이 너무 가벼웠고 평화로웠다.
지난 학기에는 야타이 장사 때문에 소풍도 가지 못했고 반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맥주도 한 잔 마시고 가라오케에서 놀아도 돈을 낼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긴 것이었다.
정말 무작정 일본에 와서 몇 달 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부지런히 생활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나는 그 때의 하루하루의 경험이 너무 소중했고 나도 모르게 뼈 속 깊이 새겨 져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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